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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열의 AI경제] 세계의 천재들이 찾아오는 '쿨 랩 대한민국' 만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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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 2026-10-29 11:29:34
AI 시대 연구혁신, 예산·장비 넘어 자유와 안정 갖춘 생태계로
해외 인재 유치의 출발점은 국내 연구자도 머물고 싶은 연구실
연봉 넘어 삶과 미래에 대한 신뢰…'쿨 랩' 대한민국의 필수조건

지난 글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정책체계를 인공지능(AI) 기반으로 혁신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한 해 4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과학기술 예산을 관행적인 하나마나 연구, 연구를 위한 연구에 낭비하지 말고 세계 최초의 발견과 인류 문명의 지평을 넓히는 도전적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AI가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를 혁명적으로 가속하면서 국가의 안보와 경제, 국민의 생존과 번영이 우수한 기초과학 역량과 기술혁신 능력에 좌우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구개발의 인공지능 전환(R&D AX)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자율실험실과 과학용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예산 분배자에서 연구혁신 통합설계자로의 정부 역할 전환, 실패를 용인하는 5%의 파격적 혁신연구 지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임무 중심 개편과 글로벌 협력체계 구축 등이 그것이다. 이는 정부가 주도해야 할 제도적 혁신, 말하자면 연구개발 생태계의 하드웨어 개혁이다.

그러나 하드웨어만 바꾼다고 과학혁명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구 생태계의 소프트웨어 혁신이다. 쉽게 말해 세계의 천재들이 살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 과학 동네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우수한 과학자들이 해외로 떠나지 않고, 세계 각국의 뛰어난 연구자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쿨 랩(Cool Lab)', 곧 멋진 실험실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매력적인 연구 생태계란 무엇일까. 한 가족이 이사를 준비한다고 상상해 보자. 어느 동네로 갈까를 고민할 것이다. 당연히 안전하고 편리하며 쾌적한 곳이 좋다. 교육, 의료, 교통, 문화 환경도 중요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이웃까지 있다면 금상첨화다. 연구 생태계도 다르지 않다. 과학자들이 마음 편하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해주면 된다. 연구 주제는 하고 싶은 연구와 해야 할 연구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자율과 관리의 균형을 잡아준다. 연구비는 공정한 성과 평가를 통해 잘한 사람에게 더 많이 돌아가도록 한다. 이건 정부가 제도적으로 개선하고 완성해야할 연구 생태계의 노른자 하드웨어 부분이다.

흰자에 해당하는 분위기 조성에는 여러 무형의 요소들이 작용할 것이다. 연구자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고 쾌적하다고 느낄 만큼 기술 친화적 풍토가 자리 잡고 있어야한다. 여기에는 기본 인권을 보장하는 근로 여건, 경쟁과 협력을 넘나드는 상호발전적인 동료 문화, 존경과 지원을 담보하는 사회적 인정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이게 바로 매력적인 연구 동네의 소프트웨어 인프라다. 이런 무형의 요소들이야말로 세계적인 과학기술 인재를 끌어들이는 진정한 경쟁력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은행이 2025년 11월 발표한 '이공계 인력의 해외유출 결정요인과 정책적 대응방향'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미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이공계 박사 인력은 2010년 약 9000명에서 2021년 약 1만8000명으로 두 배 증가했다. 국내 이공계 주요 5개 대학 출신 인력이 해외 순유출 인력의 47.5%를 차지했다. 국내에서 근무하는 이공계 인력의 42.9%가 향후 3년 안에 해외 이직을 고려하고 있으며, 20~30대에서는 그 비율이 70%에 달했다. 해외 이직을 생각하는 이유도 연봉만이 아니었다. 연구 환경과 국제적 네트워크, 경력 발전 기회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막대한 교육비와 연구비를 투입해 길러낸 인재들이 더 나은 연구 생태계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두뇌 유출을 넘어 대한민국 미래 성장 동력의 유출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2일 한국을 방문한 'AI 4대 천황' 얀 르쿤 AMI랩스 회장의 충고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 AI 혁명이 피지컬 AI와 로봇공학에서 일어날 것이라며, 제조업 기반과 우수한 연구 인력을 갖춘 한국에 커다란 기회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적인 AI 연구 생태계를 구축하려면 해외 우수 인재들이 한국을 찾아오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중국 인재를 끌어들인 싱가포르와 고급 인재 유치에 적극적인 일본의 사례를 거론하면서 한국도 과학기술 인재 이민정책과 중국 인재 흡수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르쿤의 충고는 매우 현실적이다.

중국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AI·반도체·로봇공학 인재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첨단기술 기업에서 일하는 엘리트 엔지니어들 사이에는 스스로를 '인육전지(人肉電池)'라고 부르는 섬뜩한 표현이 있다. 인간을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사용하는 배터리에 비유한 것이다. 하버드대 사회학자 야원 레이의 연구를 인용한 카이스트 이종식 교수의 최근 글에 따르면, 중국의 일부 첨단기술 기업에서는 장시간 노동과 극단적인 성과 경쟁, 35세 전후의 고용불안이 일상화돼 있다. 높은 연봉과 주택, 도시 거주 자격이라는 화려한 보상이 주어지지만, 정작 연구자의 자유와 노동권은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다. 레이는 이를 '도금된 새장'이라고 표현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결국 인간을 가두는 새장이라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대한민국의 기회가 있다. 중국과 연봉이나 연구비 규모만으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연구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 안정적인 생활환경에서는 얼마든지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중국의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들에게 한국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정당하게 보상받으며, 가족과 함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나라라는 믿음을 심어주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AI·반도체·로봇·바이오 등 전략 분야의 해외 연구자들에게 장기 체류와 영주권 취득을 지원하고, 배우자의 취업과 자녀 교육, 주거와 의료까지 연계하는 '글로벌 과학인재 정착 패키지'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는 해외 석학과 젊은 연구자들이 독립적인 연구팀을 꾸릴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도 갖추어야 한다. 물론 국가 핵심기술 보호와 연구보안 심사는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 인재 유치와 기술안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교하게 병행해야 할 국가전략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한 특별대우에 앞서 한국의 연구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조차 연구비 확보 경쟁과 단기 실적 평가, 불안정한 고용과 과도한 행정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연구자들에게는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와 안정성을 외국인에게만 약속한다면 지속가능한 인재 유치 정책이 될 수 없다. 정부는 연구 성과의 단기 평가 관행을 개선하고, 젊은 연구책임자에게 장기 연구비와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연구자의 창업과 국제 이동, 대학과 기업 간 교류를 활성화하고, 국적과 나이가 아니라 창의성과 실력으로 평가받는 개방적인 연구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외국인 연구자에 대한 언어와 문화의 장벽도 낮춰야 한다. 세계적인 천재들이 한국 연구실에서 국적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동료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글로벌 연구 생태계가 완성된다.

인재 확보 경쟁은 결국 돈의 경쟁이 아니라 삶의 질과 미래에 대한 신뢰의 경쟁이다. 아무리 높은 연봉을 지급하더라도 연구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사회에서는 창의성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반대로 자유롭게 질문하고 실패하며, 동료와 토론하고, 평생에 걸쳐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에서는 위대한 발견이 탄생한다. 연구자가 행복해야 연구가 지속되고, 연구가 지속돼야 혁신이 축적된다. 과학기술 강국의 진정한 경쟁력은 건물이나 장비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AI 시대에는 천재 한 명의 창의적인 발견이 수십조 원의 산업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분명하다. 40조 원의 연구개발 예산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데 머물지 말고, 세계의 천재들이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연구하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국의 '인육전지'와 '도금된 새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도 여기에 있다. 과학자를 갈아 넣어 기술 강국이 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과학자가 행복하기 때문에 테크 대국이 되는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미래다. 세계의 인재들이 대한민국을 향해 "저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하는 날, 진정한 과학기술 강국의 문이 열릴 것이다.
  

▲ 노성열 논설위원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을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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