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모호함 뒤에서 백인 가문이 회피해 온 '약속'
장편으로 펴내 근본적으로 변한 것 없는 현실 반영
인간의 어두운 심연과 역사 직시하는 작가의 고투
"인간 개인은 희망적이지만, 집단은 절망과 환멸"
1994년 넬슨 만델라의 당선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법적으로 공식 종식되었을 때, 전 세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일궈낸 기적에 찬사를 보냈다. 폭력의 사슬을 끊어낸 진실화해위원회의 고백과 사죄는 도덕적 승리로 기록되는 듯했다. 32년이 흐른 지금, 남아공에서는 극단적인 빈부격차, 만성적 고실업, 흑백 간의 경제적 단절, 정치 엘리트들의 구조화된 부패와 치안 부재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정치권력은 이양되었으되 경제권력은 여전히 소수 백인과 신흥 특권층의 손에 머물러 있고, 최빈곤층의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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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부커상에 이어 올해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남아공 작가 데이먼 갤것. 그는 "저항운동의 영웅이 지금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인물이 된 경우가 많다"면서 "새로운 남아공의 도덕적 모호함이 내 소설의 주제"라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토지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제15회 박경리문학상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데이먼 갤것(Damon Galgut·63)에게 돌아갔다. 그는 부커상 수상작 '약속(The Promise)'을 통해, 백인 스와트 가문이 평생 헌신한 흑인 하녀 살로메에게 허름한 농가 주택의 명의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40년에 걸쳐 끝내 외면해온 과정을 네 번의 장례식으로 축조해냈다. '도덕적 모호함'으로 버텨온 국가와 사회의 비겁한 자화상을 드러내며 자신이 몸담은 세상의 구조와 인간을 문학의 눈으로 성찰했다.
'혁명'을 뜻하는 영어 단어 레볼루션(revolution)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도록 둥글게 굴린다는 의미의 라틴어 레볼베레(revolvere)에서 유래했다. 이를 두고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는 '반쪽 혁명'이라는 시에서, 출발했던 그 자리로 돌려놓는 한 바퀴 회전이 아니라 '다시 되돌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반 바퀴 회전'을 원한다고 노래했다. 혁명이 혁명을 배반하고,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레볼루션이라면 암담할 수밖에 없다.
갤것의 문학과 태도는 군부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쟁취했으나 경제적 불평등과 청산되지 않은 과거 속에서 진영 간 반목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에도 울림을 준다. 지난 9월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이어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방한한 그를 간담회에서 만났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과 여전히 완고하게 남은 것은?
"이론상 평등하고 정의로운 법체계가 갖춰졌지만 일상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과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 대체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상징적으로 지도부는 바뀌었지만, 그 최상층 아래 남아공 사회는 불평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 최상위 부유층은 여전히 대부분 백인이고, 최빈곤층은 여전히 대부분 흑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혁명(revolution)을 바퀴의 회전으로 이야기한다. 혁명은 한 바퀴를 완전히 도는 것이고, 정작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반 바퀴 회전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한 바퀴의 혁명을 겪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뒤집히는 반쪽 혁명이다."
-소설에 집중하는 주제를 꼽는다면.
"고백하자면 나는 남아공이 작가들에게 지우는 정치적 제약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연애소설이나 역사적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남아공은 작가들 사이에 역사를 해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나라다. 역사의 상처가 너무 생생해서 다른 주제는 조금 무의미해 보일 정도다. '새로운 남아공'의 지형이 내 영역이다. 이제는 흑과 백, 선과 악으로 갈리지 않는다. 저항운동의 영웅이던 사람들이 지금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인물이 된 경우가 많다. 새로운 남아공의 도덕적 모호함이 대체로 내 주제인 것 같다."
-아프리카 작가의 작품에는 그곳의 역사와 현실을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따른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이 족쇄가 되지는 않는가.
"1994년까지는 남아공 안팎의 출판사들이 작가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와 그로 인해 불거진 문제를 다루기를 적극적으로 기대했다. 묘하게도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94년 이후 국제 출판계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난 일로 여겼다. 남아공 작가들에게는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평범한 이야기도 남아공에서는 결국 정치로 되돌아간다. 인물 하나를 만들 때도 이 사람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부모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한 인물을 만들려 해도 이런 도덕적 질문들이 곧바로 따라붙는다. 윌리엄 포크너가 '과거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고 쓴 대목이 있는데, 남아공에 꼭 들어맞는다. 실제로 위기가 있고 사람들이 매일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위기가 없는 척하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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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먼 갤것은 "독자들은 AI가 아닌 인간이 창작한 소설을 여전히 원할 것으로 믿지만, 무섭다"고 말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
-한국에서도 역사를 다룬 창작물이 정치적 이념에 따라 논쟁에 휩싸이곤 한다.
"문학을 정치와 역사의 도식적인 관점에서만 재단하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일이다. 역사와 정치는 소설의 중요한 배경일 뿐 결코 본질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형식의 심장에는 언제나 '인간'이 놓여 있어야 한다. 역사나 정치를 사실 그대로 알고 싶다면 신문이나 역사책, 논픽션을 읽으면 된다. 소설의 역할은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 속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이 내면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포착하는 데 있다. 과거에는 명확히 한쪽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했다.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경계가 무너졌다. 어제의 '선한 사람들'이 오늘 권력을 잡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도덕적이지 않다. 인간으로서는 끔찍한 일이지만 작가에게는 매혹적인 탐구의 장이 열린 셈이다. 나는 소설 속에서 인간의 생생한 경험에 집중하고자 하며, 역사와 정치는 전면이 아닌 배경으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래된 창녀 같은 지구는, 똑같은 공연을 몇 번씩이나 낮이나 밤이나 하고 또 한다. 한편에서는 극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대본의 대사는 변하지 않고, 메이크업과 의상과 화려한 몸짓은 말할 것도 없고…… 내일 또 내일 또 모레도…… 아니, 이제는 못 하겠다. 연극에서 행인 역할로 나오는 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이 모든 걸 그만하자.'_ 죽음을 앞둔 장남 안톤의 독백('약속')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치 않는 인간의 비극적 속성과 세상에 대한 도저한 비관이 읽힌다. 인간이라는 종은 근본적으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존재인가.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겠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마주할 때 나는 상당히 희망적이다. 개별 인간은 스스로 변화하고 도덕적으로 진화할 수 있으며, 그 내면의 가능성은 실로 거대하다. 시선을 돌려 '집단으로서의 인류'를 생각하면 깊은 절망과 환멸을 금할 수 없다. 한 개인의 삶에 작동하는 윤리적 원리와 집단 전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메커니즘은 다르다. 기후 위기부터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전쟁과 정치적 충돌에 이르기까지,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만들어내는 현실은 인간의 순수한 열망들을 절벽에 부딪히게 만든다. 집단으로서의 우리는 우주 안에서 어쩌면 '거대한 부정적 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개별 인간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인내를 쏟을 수 있지만, 집단적 미래에 대해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 이 두려운 비관에 대해, 부디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이 역사 속에서 증명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AI 기업들이 문학 작품을 대량으로 무단 학습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AI가 인간 창작자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과 저작권 침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미국의 대표적 AI 기업인 앤트로픽(Anthropic)이 내 소설 '약속'을 인공지능 학습에 불법적으로 사용했다. 나 역시 현재 미국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집단 소송 합의(Settlement)의 직접적인 당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인간이 피땀 흘려 창작한 문학 텍스트를 무단으로 긁어가 괴물 같은 도구로 진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불쾌하고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사태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내가 소설이라는 두꺼운 책을 펼칠 때 갈망하는 것은 오직 하나, '나와 동등한 피와 살을 지닌 다른 인간의 정신과 나누는 깊은 영혼의 교감'이다. AI가 지배하는 미래 세계에서도 인간적 연결에 대한 욕구는 여전할 것이다. 그 욕구가 사람들을 인간이 창작한 소설로 이끌겠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고 무엇이 올지 알기는 어렵다.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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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먼 갤것은 "개별 인간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인내를 쏟을 수 있지만, 집단적 미래에 대해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 두려운 비관에 대해, 부디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이 역사 속에서 증명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박경리문학상의 추천위원회는 전 세계 소설가 165명을 놓고 네 차례 예심을 거쳐 후보 26명을 추렸고, 심사위원회가 약 1년 동안 심사한 끝에 데이먼 갤것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는 "문학이 해야 할 일은 안이한 위로를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온 불편하고 차가운 심연의 어둠을 똑바로 응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간담회에서 말했다. 오랜 세월 자갈밭을 경작하듯 한국의 수난사와 인간을 직면해온 박경리의 문학정신과도 통하는 맥락이다. 갤것이 인용한 프로스트의 시는 이렇게 흐른다.
'나는 반쪽 혁명을 옹호한다./ …… / 다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 다시 되돌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 반 바퀴 회전(half a revolution)에 의한 진보일 것이다. / 그렇다, 혁명이란 대체로 그런 식이다. /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가 싶더니, / 이내 바퀴는 계속 굴러 또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다.' _ '반쪽 혁명'(A Semi-Revolution)
■데이먼 갤것(Damon Galgut) 연보
*196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출생.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드라마 전공.
*1982년: 19세에 장편소설 '죄 없는 계절' 발표하며 등단.
*1995년: 실존주의적 누아르 소설 '채석장' 발표(1998년 영화화).
*2003년: 남아공 민주화 이행기의 환멸을 다룬 '착한 의사'로 부커상 최종후보 선정 및 커먼웰스 작가상 수상.
*2010년: 자전적 소설 '낯선 방에서'로 두 번째 부커상 최종후보.
*2014년: E. M. 포스터를 다룬 전기소설 '북극의 여름' 발표.
*2021년: 백인 가문의 몰락을 통해 남아공 40년 현대사를 응시한 '약속'으로 부커상 수상.
*2023년: 장편소설 '약속' 한국어판 출간.
*2026년: 9월 서울국제작가축제로 처음 방한했으며, 10월 토지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제15회 박경리문학상 수상.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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