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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문학공간] "타인의 아픔 디딤돌 삼아 특권을 누리는 자는 누구인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Google구글에서 선호하는 출처로 추가
기사승인 : 2026-10-23 09:28:43
토지문화관 스페인 작가 파트리시아 데 블라스 가스카
난민촌 소녀 사진 상 받은 이의 죄책감 다룬 '소스티카'
스페인 여성 현실, 청년 세대 좌절 파고든 '엄마의 얼굴'
세계 누비는 인물 사진가, 분쟁 지역 르포 기자, 소설가
"인간에 대한 존중·입체적 조명이 작품 목적보다 우선"

타인의 고통은 예술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연민이라는 휘장 뒤에서 죄책감을 스스로 사하는 위선에서 자유로운가.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은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을 탐구하고 대상화하는 예술의 오랜 딜레마이자 화두인 이 물음은 다양한 장르에서 여러 방식으로 사유돼 왔다. 최근 이창동 감독 영화 '가능한 사랑'을 두고 새삼스럽게 부각된 담론이기도 하다.
 

▲ 사진과 소설로 인간의 심층을 탐색해온 스페인 작가 파트리시아 데 블라스 가스카. 한국과 스페인 작가 교류 프로그램으로 토지문화관에 머물고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스페인 작가 파트리시아 데 블라스 가스카(Patricia de Blas Gasca·38)의 장편 '소스티카'(라스미아·2022)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진가 소피아가 난민촌에서 찍은 소녀를 찾아 네팔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그 사진이 공모전에서 상을 받자, 부모 동의도 분명치 않은 미성년자 초상으로 돈을 벌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실제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투사한 파트리시아는 이 소설 인세 전액을 구호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두 번째 장편 '엄마의 얼굴'(룬베르크·2025)은 한국 현실과 더 직접 겹친다. 난임 시술에 매달리는 여성, 출산 뒤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성,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여성이 나온다. 그 밑바닥에는 경제 위기가 정점이던 2011년 이후 학위와 외국어 실력으로도 집 한 칸 마련하기 어려워진 스페인 청년 세대 좌절이 깔려 있다.


파트리시아는 스페인 사라고사주에서 태어나 라디오 온다 세로 기자로 10년간 일했고, 네팔 대지진 사태와 팔레스타인 현장을 취재했다. 세계 각지를 누비며 인물들을 깊이 드러내는 사진 작업과, 인간의 심층을 사유하기에 적합한 문학을 동시에 천착해 왔다. 스페인문화활동협회(AC/E)와 토지문화재단 작가 교류 프로그램으로 원주 토지문화관에 머물고 있는 그를 만났다.

-세계 여러 지역을 다니며 많은 인물 사진을 찍었다. 사진가의 시선이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나 문학 속 인물을 빚어내는 순간 모두, 눈앞의 타인을 향해 하나의 특정한 시선을 취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시선은 결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 자연 풍경이나 건축 유적을 찍는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언제나 사람의 얼굴만을 프레임에 담아왔다. 그렇게 찍어둔 인물 사진들은 훗날 소설 속 인물을 형상화하는 과정에 큰 밑거름이 된다. 사진 속 어떤 눈빛, 옷차림, 특유의 손짓 하나에 시선이 멎으면, 그 조각들을 단초 삼아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낸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카메라에 담았던 한 사람의 얼굴에서 출발해 그의 삶 전체를 상상하며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기도 한다."

-사진의 윤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치유의 통로가 글쓰기였나.
"허구의 서사를 택한 것은 신념을 일방적으로 설파하거나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윤리적 질문들을 던지고 논쟁의 장을 열기 위해서였다. '유럽인 사진작가는 네팔이라는 나라의 풍습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한가. 사생활 보호권은 왜 지역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가. 빈곤에도 미학이 존재하는가. 연대는 어느 순간 시혜적 온정주의로 변질되는가.' 이 소설은 실제 여정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자전소설은 아니다. 단정적인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독자 스스로 질문을 곱씹으며 자신만의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여백을 남겨두고 싶었다."
 

▲ 파트리시아가 인도에서 찍은 소녀 사진(위·당시 가족과 함께 찍은 다른 사진으로 촬영 동의 확인)과 이 사진을 모티프로 펴낸 소설 '소스티카'(오른쪽), 스페인 여성과 청년 세대의 현실을 그린 '엄마의 얼굴'(왼쪽). [작가 제공]

 

-타인의 고통을 카메라나 활자로 담아낼 때 지켜야 할 윤리적 경계는.
"타인의 고통은 대상의 격렬한 감정을 포착하려는 사진가에게 매혹적일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존중이 어떤 훌륭한 사진이나 기사를 얻는 목적보다 앞서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타인의 아픔을 르포 기사나 문학 작품으로 옮길 때, 상대방을 온전히 존중하기 위한 장치들은 많다.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고, 작업의 의도를 투명하게 설명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여 이야기의 능동적인 주체로 참여시키는 일이다. 나아가 상투적인 클리셰와 편견을 넘어 상대를 단순히 무력한 피해자로만 축소하지 않고 한 인간이 품은 다층적인 입체성을 조명하는 시선도 필요하다."


-'엄마의 얼굴'은 난자 기증, 난임 클리닉의 이면, 대리모 산업 등 첨예한 윤리적 쟁점을 다루었다.
"시장 논리가 사적인 영역 깊숙이 침투하면서 여성의 몸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가격표를 붙여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해 가는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 사회경제적 구조의 모순은 여성들로 하여금 출산을 늦추게 만들고, 이는 자연스레 난임의 증가로 이어진다. 사설 난임 클리닉들은 이 비극적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상업적 이익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병원이 챙기는 막대한 이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돈을 대가로 난자나 자궁을 내어주어야 하는 취약 계층의 여성들을 착취한다. 스페인 국내법상 대리모 시술은 엄격히 금지돼 있지만 규제가 느슨한 해외로 건너가 대리모를 통해 아기를 얻은 뒤 본국에 데려와 호적에 입적시키는 편법은 묵인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위선적인 태도이며, 사회 전체가 깊이 성찰해야 할 문제이다."

-한국 사회도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소설 속 한 여성의 선택처럼 스페인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나.
"그동안 많은 진전이 이루어져서, 오늘날 스페인 사회 대다수는 여성이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모성이 반드시 필수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여성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끊임없이 품평한다. 아이를 너무 일찍 낳아도, 너무 늦게 낳아도 손가락질하고, 안정적인 경제력이나 짝이 없이 아이를 낳아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수군거린다. 소설 속 인물 중 하나인 카롤리나는 제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대변한다. 세상의 시선과 압박 때문에 그녀가 끝내 결심을 꺾는 뻔한 전개만큼은 결코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소설 속 한 인물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기계적 기회균등의 허상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스페인뿐 아니라 치열한 경쟁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한국 청년들에게도 울림을 주는 대목이다.
"명백히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고뇌다. 나는 2011년 경제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에 대학을 졸업했다. 학창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어른이 되어 좋은 일자리를 얻고, 집을 장만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들으며 자랐다. 현실은 냉혹했다. 학위가 여러 개 있고 외국어를 몇 개씩 유창하게 구사해도 인간다운 임금을 보장받지 못했다. 지금 스페인에는 번듯한 일자리가 있어도 스스로를 빈곤층이라 여기는 내 또래 청년들이 부지기수이다. 최근 몇 년간 폭등한 주거비 탓에 월급의 대부분이 고스란히 월세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기성 시스템을 향한 환멸과 분노, 회의감이 팽배해지고 한국처럼 출생률이 곤두박질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태어난 배경, 집안의 자산, 인맥, 운 같은 요소들이 각자의 노력 여하와는 무관하게 도달할 수 있는 높이를 규정해 버린다. 특히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족쇄는 가혹하다."

 

▲ 파트리시아는 "대도시에 사는 데 익숙한 편이라, 자연에 둘러싸인 한적한 곳에서 보내는 몇 주는 커다란 변화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토지문화관 생활은 어떤가.
"자극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번잡한 마드리드 도심과 달리, 이곳에서는 평소라면 눈여겨볼 틈이 없었을 사소한 것들을 가만히 포착하게 된다. 나뭇잎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 까치 두 마리가 짝을 지어 날아가는 몸짓, 어떤 밤이면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방 창문에 부딪히는 호박벌, 레지던시 주변 길가 깻잎에서 풍겨오는 향기 같은 것들…. 이 모든 풍경이 섬세한 감각을 일깨우고, 문장을 한층 더 세밀하고 감각적으로 빚어내게 한다."

파트리시아는 "한국에서 발견한 가장 귀한 존재는 레지던시의 여성 동료 작가들"이라며 "그들과 함께 한국의 '정'이라는 말이 품은 뜻을 배울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 작가 중에서는 정보라, 손원평, 조남주, 윤고은 작가를 주목해 왔다는 그는 특히 소설가 한강을 좋아한다면서 "그녀의 문장은 읽는 이를 결코 무덤덤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전했다. 파트리시아가 제시하는, 무릇 인간을 탐색하는 이들이 품어야 할 질문.

'내가 찍는 이 사진이, 내가 쓰는 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는 타인의 아픔을 디딤돌 삼아 어떤 기득권이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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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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