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기자의 눈] 이름의 자유를 가두다…'현대판 피휘' 닮은 헌재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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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이름의 자유를 가두다…'현대판 피휘' 닮은 헌재 결정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Google구글에서 선호하는 출처로 추가
기사승인 : 2026-05-04 16:41:42
민주 사회에 부적합한 전근대 동아시아 관습, 피휘
헌재, '이름에 통상 사용되는 한자' 규정 5:4 합헌
"이름 결정과 사용에 대한 국가 개입은 신중해야"
우선해야 할 것은 행정 편의주의 아닌 국민 기본권

전근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는 피휘(避諱) 관습이 있었다. 이름을 짓거나 문장을 작성할 때 군주, 집안 조상, 성인의 이름 등에 이미 쓰인 한자는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었다. 군주만이 아니라 군주의 아들인 태자 이름까지 피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휘에는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의 이름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군주 등의 이름에 쓰인 한자와 음이 같은 글자를 피하기도 했다. 주어진 문장에 피휘 대상 한자가 포함돼 있으면 획의 일부를 생략해 그 글자를 변형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한자로 대체했다.

피휘를 하지 않고 군주 이름 등에 쓰인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무례한 짓으로 여겨졌다. 어떤 글자를 사용했는지는 한자 문화권에서 민감한 문제였다. 특정한 한자를 사용했다가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일으킨 '문자의 옥(獄)'이 그런 사건 중 하나다. 주원장은 황제권 강화를 위해 다수의 건국 공신을 비롯한 수많은 신하를 처형했다. 문자의 옥 때에는 승려, 도적 등과 관련된 특정한 한자를 상소문 등에 사용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젊은 시절 승려, 도적 등으로 지냈던 주원장의 숨기고 싶은 이력을 떠올리게 하는 한자들이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피휘 관습은 한반도에도 전해졌다. 피휘가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 시대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에는 왕자 이름을 지을 때 벽자(僻字) 즉 흔히 쓰이지 않는 글자를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글자를 왕자 이름으로 하면 백성의 불편이 커질 것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피휘는 한자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지속됐지만 오늘날 적합한 관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왕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 김상환 헌법재판소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4월 심판 사건 선고를 위해 헌법재판관들과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29일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 제3항에 대한 헌법 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5(합헌) 대 4(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고 3일 밝혔다.

해당 조항은 자녀 이름에 한글 또는 '통상 사용되는 한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통상 사용되는 한자'의 범위는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도록 돼 있다.

현재 이름에 쓸 수 있다고 허용된 '통상 사용되는 한자'는 9389자다. 제도가 도입된 1991년에는 2731자였는데, 그 후 2~3년에 한 번 정도씩 추가 작업을 거듭한 결과다.

이번 헌법 소원은 딸 이름에 '예쁠 래(婡)' 자를 넣어 출생 신고를 하려 한 시민이 청구했다. '통상 사용되는 한자'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해당 한자 이름의 등록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합헌 의견을 낸 5명의 재판관은 "이 조항이 자녀의 이름을 지을 자유를 제한하는 정도는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되는 이름은 "사회 구성원들이 실제로 읽고 사용하는 문자로 등록"돼야 하며, 한자 수가 방대한 점 등을 고려하면 "전산 시스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통상 사용되는 한자'의 범위를 미리 정해둘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위헌 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은 이 조항으로 인해 "기본권이 제한되는 정도는 중대하다"고 판단했다. 해당 조항이 "단순히 행정상의 편의를 이유로 이름에 사용할 수 있는 한자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의 복리에 반하지 않는 한 원하는 한자를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가 부모에게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합헌 결정은 현대판 피휘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개인의 정체성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인 이름을 정하는 일을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규제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다. "이름의 결정과 사용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위헌 의견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전근대 피휘 관습과 이번 합헌 결정은 목적, 문화적 맥락 등에서 차이가 있다. 피휘 관습과 달리, 이름에 사용 가능한 한자를 제한하는 것은 행정 편의주의 성격이 강하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행정 편의주의보다 국민 기본권을 우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름에 사용 가능한 한자를 제한해야 하는 이유로 전산 시스템 문제를 제시하는 부분은 다소 궁색해 보인다. 제도가 도입된 1991년은 컴퓨터 한 대 없는 가정이 적지 않던 때였다. 스마트폰이 넘쳐나고 많은 사람이 인공 지능 기술 활용에 관심을 갖는 오늘날은 전산 시스템 문제에서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시기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통상 사용되는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사용하면 오독이나 오기로 인한 불편이 발생할 수 있다는 합헌 의견 재판관들의 우려는 과도해 보인다. 그런 우려보다는 "이름의 한자가 개인의 동일성 식별을 위해 단독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 시점"이라는 위헌 의견 재판관들의 판단이 한국 사회 상황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 김덕련 기자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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