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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문학공간] "내 다정한 젖꼭지'에 담긴 환한 몸의 서사"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기사승인 : 2023-03-03 08:52:26
10년 만에 펴낸 천운영 새 소설집 '반에 반의 반'
데뷔작에서 시작한 여성의 몸과 서사 종결 의미
"'어머니'와 '아버지'의 순환은 새 세상 낳는 일"
남극 다녀와 진화생물학 공부하며 생태소설 구상
"데뷔작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이제 마무리하는 느낌입니다. 오래 미처 끝내지 못한 여성의 몸과 여성 서사를 하나 완성한 것 같습니다. 23년 동안 비슷하지만 다른 얘기를 계속해왔는데 처음 비롯된 이야기가 이제 매듭지어지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참 좋아요."

▲다섯 번째 소설집을 펴낸 천운영. 그는 "등단 이래 천착해온 여성의 몸과 서사를 일단락 짓는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천운영이 10년 만에 다섯 번째 소설집 '반에 반의 반'(문학동네)을 펴냈다. 그동안 스페인 식당을 꾸려 밥을 하고, 남극에 세 차례나 다녀오면서 생태에 관심을 기울이며 대학원에 들어가 진화생물학을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삶을 꾸리느라 소설에 전념하지 못한 탓에 간격이 길어졌다. 사람과 현장에 직접 부딪치며 취재해 소설로 소화해내는 그의 스타일을 아는 이들이라면, 공백기가 단지 집필에 집중한 기간이 아니었을 뿐 몸으로 소설을 쓰는 시간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울 연남동에서 만난 천운영은 이번 소설집이 데뷔작 '바늘'(2000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당선작)에서 시작된 자신의 여성 서사가 완결되는 느낌이어서 첫 책을 낼 때처럼 설렌다고 했다. 이웃집 남자가 가장 강한 것을 문신해 달라고 주문했을 때 여자가 그려넣은 바늘을 두고, 천운영은 그때 이렇게 썼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어떤 힘과 미의 근원, 강함의 근원이 여자의 성기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 문장이 왜 나왔는지 그때는 저절로 나온 문장이어서 몰랐는데, 돌고 돌아 이제 나이가 드는 과정을 거쳐서 늙어도 졸지 않는 할머니의 젖퉁이에 이르게 된 거죠. 계곡에서 훌훌 벗고 그냥 춤추면서 환하게 빛나는 젖퉁이."


이번 소설집에는 9편이 수록됐는데, 표제작 '반에 반의 반'에 등장하는 할머니 '기길현'은 다른 단편들에서도 연작 소설처럼 나오는 문제적 인물이다. 할머니 제사를 마치고 모여 앉은 식구들이 할머니의 지난 이야기를 회고하다가 관악산 계곡에 놀러간 일을 털어놓았던 것인데, 그날 할머니가 계곡물에 빠진 김에 얇은 속치마 차림으로 흥에 겨워 춤추던 이야기가 나왔다. 이 이야기를 소설에 쓸까 염려해 큰아버지가 '나'를 불러 그런 일이 없었다고, 기록에 없는 일이라고 전제하며 할머니의 다른 큰 미덕과 강단을 들려주는 맥락이다.

할머니 기길현 여사가 6.25 전쟁 국면에서 평소에 떡을 해서 돌리며 살던 인품으로 벽장에 갇힌 큰아들을 살려낸 일화를 큰아버지는 들려주었다. 굳이 할머니의 관악산 계곡 환한 한때를 다른 인품으로만 감싸려고 했던 것인데, 어느 한쪽 이야기로만 할머니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이 할머니는 다른 단편 '우니'에서는 '독골댁'으로 등장하거니와, 며느리를 끔찍히 아끼던 시아버지가 그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관동댁'을 후취로 들였다. 시아버지가 죽은 뒤 독골댁은 어린 시어미 관동댁을 받아들여 둘이서 수십년간 우정과 애증을 쌓으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시종 대화체로 구성지게 펼쳐진다. 독골댁이 어린 '어머니'에게 '우니'의 맛을 가르쳐 주며 생색을 내자, 아무것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 '관동댁'이 받아치는 마지막 대사는 찰지다.

-어머니는 인생을 몰라도 너무 몰라. 요 맛도 모르구, 아직도 갈챠줄 게 많이 남았으니 어쩌나? 내가 오래오래 살아야지.

-한나한나 다 가르쳐줬제. 버선 맹그는 것도 가르쳐주고 나백김치 담그는 것도 가르쳐주고, 우니 맛도 가르쳐주고. 나도 뭐 한나 가르쳐줄까? 그렇게 메느리만 이뻐했던 그 냥반이 밤마다 내헌테 머라 했는지 아는가? 요 맛은 아무도 모를 거다. 요 맛이 최고다. 요 맛이 최고야. 어릴 적에는 고 말이 고로코롬 무섭고 싫드만, 독골댁은 죽어도 그 냥반 다 모를 거이네. 암만, 내 양반인디?

'내 다정한 젖꼭지'는 독골댁 서사의 정점이다. 기길현 여사 마지막 가는 길에 그녀의 후일담을 펼치는 이 단편에서 발인을 앞둔 아침을 먹을 때 누군가 초인종 달린 집 이야기를 꺼내자 할머니 젖꼭지로 화제가 서서히 바뀌어간다. 할머니 젖꼭지는 초인종이 되었다가, 팥 알갱이가 되었다가 버찌 씨가 되면서 '모든 자식들이 한 번씩 입에 물고, 자식의 자식들이 딩동댕동 조물조물 만지고 나자 일제히 숟가락질을 멈추고 저마다 어떤 생각에 빠져들어 금방 눈가가 촉촉해지는' 상황이 이어졌다. 엄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하는 말.

-죽은 엄마 젖 빠는 얘기 그만하고, 이제 그만 가보자고.

▲천운영은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늙은 여자의 젖퉁이"라며 "그 지점이 퍽 마음에 든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아버지가 되어주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딸이 보기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애를 작정하고 임신시켜 결혼해서는, 호강은커녕 평생 멋대로 굴면서 함부로 대하고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더니 다 늙어빠져서야 비굴하게 징징대며 애원하는 꼴'이다. 세금 혜택 등 때문에 위장이혼을 하는 엄마에게 딸은 '이왕 서류상으로 정리가 된거 진짜 이혼하고 이제부터 엄마 인생 마음껏 누리며 살라'고 하자, 엄마는 의외로 '네 말대로라면 내 인생 참, 슬프지 않겠느냐'고 응답한다. 혼전 임신으로 낳은 자식을 안고 처음 시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그이가 며느리에게 '저 사람 아버지가 되어주어라'고 했다는 말을 거론하며 '내 아버지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일단 사랑을 주기로 했다'고 회고한다.

"무능해도 사랑만큼은 충분히 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잖아요? 그 사람이 아버지 역할을 못했다고 할 수는 없죠. 각자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스러움과 다정함을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소설에서 어머니가 자기가 배운 바로는 아마도 아버지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무능해도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으니, 내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하는 게 아버지가 되는 건데 결국 그렇게 한다는 건 그 세계를 보듬는 것에서 비롯되니까 엄마의 역할과 똑같은 거잖아요? 비록 미흡하고 모자람이 있더라도 보듬고 사랑해서 이 세계를 받들었다면, 그건 결국 다른 세계를 낳는 일입니다. 가부장체제의 전복을 넘어서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순환하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번 소설집에는 이밖에도 20대 퀴어 여성을 엄마 세대의 시각으로 보듬는 '우리는 우리 편이 되어', 독골댁이 졸지에 아이를 떠안게 되는 과정의 전사가 담긴 '명자씨를 닮아서'와 '봄밤',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에 숨어 있는 차별과 혐오를 섬뜩하게 묘파한 '다른 얼굴', 실제로 4박5일 동안 입원해 체험했던 '금연캠프' 들이 실려 있다. 

"이번 소설집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소설로 넘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키워드가 다정함이에요. 이타적인 것이 살아남는 공생에 관한 것이 적자생존 다음 단계의 진화생물학인데, 소설을 써보니 진화 과정과 똑같은 과정을 제가 겪었더라고요. 이제 마지막 남은 키워드는 다정함으로 남았고, 그 다정에서 출발을 하되 여성의 몸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하나 끝냈으니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죠."

▲남극에 세 차례 다녀오며 동물행동학을 공부하고 있는 천운영은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천운영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2013년 남극 극지연구소에 가서 현장 체험을 한 뒤, 이듬해에는 정지우 감독과 함께 다시 가서 다큐멘터리 '남극의 여름'을 제작했다. 이때의 체험이 강렬해서 다시 갈 수 있는 연구원 자격을 얻기 위해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대학원에 진학해 진화생물학 중에서도 동물행동학을 공부해 4학기를 마치고, 이제 논문을 쓰는 단계에 있다. 지난해에는 연구원 자격으로 남극에 가서 5개월 동안 물범과 교류했다. 2016년부터 2년 동안 스페인 식당 '돈키호테의 식탁'을 운영하며 어머니 남명자 여사와 함께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일을 하다, 본전도 챙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지만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정말 바보 같고 모자라고 너무나 미흡하구나, 그거 깨닫는데 23년이 걸렸다는 느낌이에요. 결국 세상을 이해하려고 소설을 썼는데 알고 보니 알게 된 건 나의 모자람이라는 거죠. 그걸 알게 된 건 소설 써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려고 애를 쓰다 보니 알게 된 거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안 돼요. 소설을 쓰는 게 너무 다행이에요."

이제 새로운 차원의 생태 소설이 그가 꿈꾸는 다음 단계다. 우선 남극을 무대로 물범이 등장하는 동화가 먼저 나올 것 같다. 식당을 운영한 체험으로 써놓은 장편 '폐업일기' 출간은 뒤로 미루고, 남극 체험과 생태학 공부를 배경으로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제대로 시도된 적 없는 에코 추리소설을 먼저 구상하는 중이라고 했다. 몸으로 부딪쳐 느리지만 튼실하게 소설을 지어나가는 뚝심이 남다른 천운영의 고백.

-공을 들여야 가까스로 글이 좋아진다. 타고난 소설가는 아니라는 얘기.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습득하고 거듭 공을 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쓸 수 있다. 소설이란 세상을 먹고 소화시켜 싼 똥이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믿고 있으니까. 내 속의 것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거니까. …나는 오래 쓸 것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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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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