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왕비를 쉽게 죽였다"…명성황후 시해그룹 편지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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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쉽게 죽였다"…명성황후 시해그룹 편지 발견

김명일 Google구글에서 선호하는 출처로 추가
기사승인 : 2021-11-16 14:56:12
김문자 학자 "사료 발굴·검증할 주요 자료" 명성황후 시해 후 일본 외교관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나왔다.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 지난 2018년 서울 운현궁에서 열린 고종과 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 [뉴시스]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는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시해됐으며, 이 사건은 을미사변으로 불린다. 사변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등이 지휘했다.

일본 일간지 아사히신문은 "조선에 영사관보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발송한 편지가 발견됐다"고 16일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이 발견됐다고 전한 편지는 총 8통으로, 수신자는 호리구치의 고향 니가타(新潟)현 나카도리무라(中通村)에 거주 중이던 친구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다. 호리구치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1895년 10월 18일까지 발송했다.

시해 다음 날인 10월 9일에 발송한 6번째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궁 진입은 내 담당 임무였다", "담을 넘어… 겨우 오쿠고텐(奧御殿·명성황후의 거처를 이른 말)에 도달해 왕비를 시해했다" 등 내용이 적혔다. 호리구치는 "생각 외로 쉬웠다. 오히려 놀랍다"는 감상도 남겼다.

호리구치의 편지는 나고야에 거주 중인 일본계 미국인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77·長谷川スチーブ)가 고물상에서 발견했다. 아사히신문은 편지가 보관됐다고 여겨지는 장소와 기록 내용, 소인, 봉인, 편지 작성법 등을 고려했을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역시 편지에 기재된 '흘려쓴 붓글씨'를 판독해 "호리구치의 친필임이 틀림없다"고 분석했다.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을 저술한 김 씨는 관련 분야 전문가다.

그는 "현역 외교관이 왕비 시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건"이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아직도 불분명한 점이 많은데, 이 자료는 세부적인 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가치 높은 자료"라 말했다.

을미사변에는 일본 군인, 외교관, 민간인들이 모두 연관됐다. 사건 이듬해인 1896년 1월 관련자 중 육군장교 8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으나 무죄 선고를 받았다. 편지 작성자인 호리구치와 주동자 미우라 고로 등 48명도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소송이 중지돼 석방됐다.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이미 맺어진 상태에서 조선의 재판권이 미치지 못한 결과였다.

KPI뉴스 / 김명일 기자 terr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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