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67년 최장수 학원밀알장학재단, 전쟁 중 희망의 씨앗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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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최장수 학원밀알장학재단, 전쟁 중 희망의 씨앗 뿌리다

김형환
기사승인 : 2020-05-15 14:02:45
학원 잡지 출판인 김익달 선생 1952년 설립
가난한 중학생 수재 선발해 고교·대학 전액 지원
800여 명 장학생 배출…밀알회 조직해 사회 보은
70년 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600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와 학교와 같은 기반 시설을 모두 파괴했다. 학도의용군으로 끌려왔던 남학생들과 피란 중이던 여학생들이 대부분 학교로 복귀했지만 교실도, 교과서도 없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출판사 '학원사' 설립인 김익달(1985년 작고) 선생은 이들을 도와줄 방법을 고민했다.

▲ 학원밀알장학재단 사무실에서 찾아낸 사진. 김익달 선생과 장학생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정확한 시기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학원장학밀알재단 제공]

김익달 선생, 사회의 밀알을 뿌리다

1952년 11월 김익달 선생은 이들을 위한 학생 교양잡지 '학원'을 창간했다. 당시 '학원'은 학생들에게 교과서이자 유일한 문화생활의 창구였다. '학원'에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등 교과 학습내용 뿐만 아니라 시사, 만화, 문화 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학원은 발간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김익달 선생은 잡지를 통해 장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학원 잡지는 50, 60년대 중고등 학생들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독보적인 학생 잡지로 인기를 누렸다.

1953년 2월 전국 중학교에서 '가난하지만 공부 잘 하는' 중학생들을 추천받아 시험을 거쳐 12명의 장학생을 선발한 것이 시초였다. 처음에는 1년 간 장학금을 지급하려고 했지만 '장학생이 공부할 동안 계속해서 금전적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김익달 선생의 뜻에 따라 그들을 끝까지 책임졌다.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 진학하면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급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학금이었다. 그 장학회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2020년, 52기 장학생 12명을 모집했다. 한국에서 최장수 장학회다.

지금까지 67년 간 800여 명의 장학생이 수혜를 받았다. 학원밀알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았던 청소년들은 성인이 돼서 정계·재계·법조계·과학계 등 사회 각지에 진출했다. 민주화 운동의 대부 고 김근태 전 의원,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113개의 구상성단을 새로 발견한 이명균 서울대 교수도 학원장학생 출신이다.

최종 장학생 선발을 앞두고 김익달 선생이 직접 면접을 봤는데 장래 희망을 물었을 때 "판검사가 되겠다"는 학생들은 탈락시켰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판검사가 되겠다는 아이들은 제 영리영달만 좇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다"며 자기 이익보다는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일꾼이 되라고 늘상 강조했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만들어낸 학원장학재단

김익달 선생은 경상북도 상주군의 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제 치하에서 빈농의 환경 속에서 자란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조국의 미래를 고민하다 1932년 17세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게 된다. 한 인쇄소의 직공으로 일하던 선생은 일본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다 인쇄소 사장의 눈에 띄어 서점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선생은 24시간 동안 책과 함께 지냈다. 선생은 조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숱한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일본의 책과 잡지를 보며 일본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리했다. 그러던 가운데 결국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국으로 돌아와 출판업(1945년 대양출판사 설립)을 시작했고 6.25 전쟁 중에 장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년 장학생 숫자가 늘어나면서 김익달 선생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장학금 재원 때문이다. 그간 장학금은 선생이 운영하던 출판사의 수익으로 지급해 왔었다. 하지만 출판사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장학사업이 불가능한 환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1961년 김익달 선생은 지속적인 장학 사업을 위한 '재단법인' 설립을 결정했다.

하지만 '재단법인'은 결국 재단의 기본 재산을 구성해야 했다. 당시 선생이 가진 것은 본인이 살고 있는 집과 토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선생은 본인의 부동산을 재단에 출연해 학원장학재단을 만들 수 있었다.

▲ 2016년 여름 진행된 학원밀알장학재단 하계수련회. [학원밀알장학재단 제공]

"김익달 선생의 뜻을 받든 후학들이 선순환을 만들어"

김익달 선생은 늘 장학생들 간의 친목과 우의를 강조했다. 1953년 1기 장학생을 모아 하계수련회를 하는 등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이런 행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행사를 통해 장학생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여러분들은 바로 밀알 같은 존재입니다. 알찬 밀알일수록 바람직한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들을 길러낸 이 사회에 한 줌의 기름진 흙을 보태야 합니다."

김익달 선생은 밀알 정신을 강조했다. 이러한 밀알 정신을 계승한 장학생 출신들이 '밀알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사회 각지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밀알회는 1997년 '밀알장학재단'을 만들어 본인들이 받았던 사랑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밀알장학재단과 학원장학재단이 합쳐 학원밀알장학재단이 만들어졌다.

윤상일 학원밀알장학재단 이사장은 "김익달 선생의 뜻을 받든 장학생들이 이제는 선순환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장학생들은 사회의 밀알이 되라는 김익달 선생의 뜻을 받들어 여전히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 줌의 기름진 흙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받은 은혜를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사회에, 후학들에게 갚거라." 김익달 선생의 유지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KPI뉴스 / 김형환 인턴 기자 khh@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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