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겨냥해 "바카야로"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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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겨냥해 "바카야로"라 했다고?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기사승인 : 2026-03-24 16:41:05
[김덕련의 역사산책 47] 안중근 순국 116주기
"바카야로" 출처 저자, 이토 히로부미 최후 못 봐
'유언 가능한 상태 아니었을 것' 지적에 힘 실려
근거 없는 제3자 저격설 출처, "바카야로"와 동일
'안중근 의거가 한국의 식민지 전락 계기' 궤변도

안중근 순국 116주기인 26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 의사 유묵 '빈이무첨 부이무교'(貧而無諂 富而無驕) 특별 전시가 시작된다.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다'는 뜻의 이 유묵은 일본 도쿄도가 6개월간 대여한 것이다.

안중근은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다. 여러 종류의 위인전을 비롯해 안중근을 다룬 책도 적지 않다. 그런데 사실로 보기 어려운 이야기임에도 사실인 것처럼 전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 지난해 12월 21일 경기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弔日本, 긴 탄식 끝에 한마디로 먼저 일본을 조문한다)'을 관람객이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에 맞은 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안중근을 겨냥해 했다는 "바카야로(바보 자식)" 발언도 그중 하나다. 이토 히로부미가 브랜디를 마신 후 누가 자신을 쐈는지 물었고, 조선인이라는 답을 수행원에게서 듣고는 "바카야로"라고 말하고 숨을 거뒀다는 주장이다.

상당수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간 안중근을 다룬 이런저런 책, 기사 등에 심심찮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심경으로 "바카야로"라고 했을지에 대한 추측을 더해 서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바카야로"설은 사실로 볼 근거가 빈약하다. 이야기의 출처로 지목되는 것은 1942년에 출간된 '무로타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라는 책이다. 무로타 요시아야는 1909년 사건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 중 한 명으로 1938년 사망했는데, 그가 생전에 했다는 이야기를 묶어 펴낸 책이다.

혹자는 '하얼빈에 있었던 사람 말이라고 하니 신빙성 있지 않겠느냐'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피격 후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 안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무로타 요시아야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을 때 그 곁에 있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 최후의 순간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무로타 요시아야가 이토 히로부미의 최후를 지켜본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토 히로부미가 피격 후 혼수상태에 빠져 유언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 연구자 신운용은 2012년 논문에서 당시 사건을 조사한 일본인 검찰관이 "(이토 히로부미가) 한마디 못하고 절명했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바카야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출처로 지목되는 '무로타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에는 이른바 제3자 저격설도 실려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총탄은 안중근의 브라우닝 권총이 아니라 하얼빈역 2층에 있던 제3자의 프랑스제 기마 총(카빈총)에서 아래쪽으로 발사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안중근 의거 자체를 부정하는 얘기다.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지만, 문제는 이 주장이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관련 서적도 여러 권 출간되며 일각에서 사실인 것처럼 유통됐다는 것이다.

음모론 유통을 가능케 한 조건 중 하나는 사건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부검하지 않은 것이다. 하얼빈을 실질적으로 관할하던 러시아 측이 부검을 제안했지만 일본 측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3자 저격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의거 현장에 있던 대다수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진술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확인해줬다. 또한 사건 당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가 이토 히로부미를 쏜 총에서 발사된 또 다른 총탄을 맞았는데, 그것은 권총 총탄으로 확인됐다. 2000년대에 들어 발굴된 이토 히로부미 사망 진단서가 총탄이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수평으로 발사됐음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있다.

 

▲ 지난해 3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원 내 안중근 의사 빈 무덤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15주년 추모식'에서 안중근 의사 손도장 대형 걸개그림이 설치돼 있다. [뉴시스]

 

학계에서는 제3자 저격설이 일본에서 유통되는 현상은 안중근 의거 폄하 및 한국 멸시 정서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더해, 제3자 저격설을 강변하는 쪽에서 진범이라며 어느 쪽을 거론하는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간 러시아인이 진범일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근거 없이 제시됐는데,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 내 대외 강경파를 진범으로 지목하는 경우다. 강경파가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음모론이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논리를 펴는 이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평화주의자로 꾸민다는 점이다. 이는 '강경파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이어져 있다. 안중근 의거가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2011년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에 대응해 조선을 식민지화했다'고 기술됐던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한반도 병탄을 비롯한 침략 문제에서 강경파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한국 강제 병합 방침에도 생전에 동의했다. 일본 내각이 그러한 방침을 정한 것은 안중근 의거 이전이었다. 안중근 의거가 한국의 식민지화 계기였다는 주장이 궤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요 참조=신주백 논문(「일제강점기 '이등박문 저격사건'을 둘러싼 안중근에 관한 국내외 조선인사회의 기억」,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7, 2008), 신운용 논문(「일본의 안중근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 제3의 저격설을 중심으로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1, 2012), 장윤미 논문(「'안중근 기념'을 둘러싼 한반도 마음체계의 갈등구조」, 『동아연구』 37-2, 2018), 마키노 에이지 논문(「안중근과 일본인 - 동양평화의 실현을 위해 -」, 『아시아문화연구』 20, 2010)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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