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확인하지 못한 무덤 구조와 유물을 현대 고고학의 방법으로 새롭게 규명
광복 이후 축적된 국립박물관의 다양한 과학적 분석 방법 적용
국립경주박물관이 1909년 일제가 조사한 신라 돌방무덤(석실분)인 경주시 서악동 석침총(石枕塚)을 117년 만에 다시 발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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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현재 경주시 서악동의 석침총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10일 국립경주박물관에 따르면 석침총이라는 이름은 무덤 안에서 '석침(돌베개)'이 발견된 데서 비롯되었다. 1909년 일제 조사에서는 돌방과 시상(屍床·주검받침), 석침 등이 확인되었지만 당시의 조사 기술과 기록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정식 발굴보고서도 발간되지 않았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이번 석침총 재발굴은 단순히 이미 발굴한 무덤을 다시 파보는 데 있지 않다. 117년 전 조사된 신라 고분에 대해 오늘의 한국 고고학이 직접 확인하고 검증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20세기 초 일제 학자들은 경주를 비롯한 한반도의 여러 유적을 조사했고 이러한 자료는 이후 한국 고고학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 일제 학자였던 세키노 다다시, 야쓰이 세이이쓰의 조사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조사 방법과 기록이 충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반도의 고대 문화를 일제의 시각에서 조사하고 해석하던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이뤄졌다.
한국 고고학은 광복 이후 수많은 발굴과 연구를 통해 크게 발전했다. 특히 신라 고분에 대해서는 무덤의 구조뿐 아니라 축조기법, 장례 과정, 유물의 배치, 피장자의 성격과 고분이 조성된 사회적 배경까지 연구할 수 있을 만큼 자료와 방법론이 축적되었다.
이번 재발굴은 일제강점기 전후에 만들어진 조사 기록을 단순히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광복 이후 80여 년 동안 우리가 축적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과거 조사를 다시 검증하고 필요한 부분을 바로잡는 작업이다.
117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고학의 조사 방법은 크게 달라졌다. 이번 조사에서는 전통적인 발굴뿐 아니라 광복 이후 크게 발전한 자연과학적 분석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돌방 바닥 토양과 돌방 벽에 발린 석회, 돌방을 만든 석재에 대한 과학적 분석 등을 통해 육안 관찰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무덤 축조와 사용 과정에 관한 정보를 확보할 계획이다.
1909년 조사 당시에는 무덤 내부 유물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오늘날 고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봉분의 축조 과정, 돌방과 봉분의 관계, 무덤길(묘도)과 무덤 둘레돌(호석) 구조, 무덤이 만들어지고 행해진 제사 흔적 등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번 재발굴에서 기존 기록과 실제 유구를 정밀하게 대조해 1909년 일제 조사자가 확인하지 못했거나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던 흔적을 찾아낼 계획이다.
특히 돌방의 구조와 축조 방법, 돌방 안 주검받침(시상)과 석침 등 매장시설의 성격을 다시 검토하고 수습하지 못한 유물과 매장 흔적을 분석해 석침총이 언제, 누구를 위해,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규명한다.
이번 재발굴과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은 1909년 석침총 조사 당시 출토되어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서악동 석침총 재발굴은 하나의 무덤에 대한 조사에 그치지 않는다. 석침총이 위치한 경주 서악동 고분군은 신라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한 대형 고분들이 집중된 신라사 연구의 핵심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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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서악동 고분 중 조사대상지(오른쪽에서 두 번째 봉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광복 이후 체계적인 발굴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 서악동 고분군의 조성 시기와 성격, 각 고분의 관계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 조사는 이러한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첫걸음이다.
석침총의 구조와 연대를 정확하게 밝히고 주변 고분과 비교함으로써 신라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돌방무덤으로 장례 방식을 변화시켜 가던 과정과 서악동 고분군의 역사적 성격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될것으로 전망된다.
석침총이 위치한 서악동 일대는 한국 고고학의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뤄진 근대적 고고학 조사의 역사를 설명할 때 20세기 초 일제 연구자들의 발굴이 중요한 출발점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 땅의 옛 유적을 직접 찾아가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 의미를 밝히려 했던 노력은 그보다 앞서 존재했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는 1817년 경주를 직접 찾아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攷)'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서 신라 왕릉을 실증적으로 탐구했다.
당시 사람들이 무열왕릉 뒤 서악동 대형 고분을 왕릉으로 판단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탁견이었다.
우리 지식인이 우리 유적을 직접 관찰하고 기록하며 과거를 실증적으로 밝히려 했던 전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석침총 재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뿌리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김대환 학예연구관은 "석침총 재발굴의 목적은 117년전 당시의 조사 성과와 한계를 넘어 광복이후 우리가 축적한 신라 고고학의 연구 성과와 과학적 분석 기술을 바탕으로 다시 검증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KPI뉴스 / 장영태 기자 3678jyt@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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