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노성열의 AI경제] 무감소비와 시성비의 시대, 사라지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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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열의 AI경제] 무감소비와 시성비의 시대, 사라지는 '나'

KPI뉴스 Google구글에서 선호하는 출처로 추가
기사승인 : 2026-08-27 11:14:59
무감 소비와 시성비 경쟁이 선택과 고민까지 대신하는 시대
편리함에 기대는 동안 인간의 주체성과 관계 능력은 약해져
일은 AI에 맡기더라도 목적과 판단, 책임만은 내가 가져야

최신 마케팅 이론 중 '무감(無感)소비'라는 게 있다. 영어로는 '프릭션리스(frictionless) 경험'이라고 부른다. 마찰을 없앤다는 뜻이다. 좋은 서비스는 이제 감동을 주는 단계를 넘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판매 전략에서 '고객 경험(Consumer Experience, CX)'을 말하곤 했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고객이 '이거 참 좋네' 하는 감동을 줄 수 있어야 잘 팔린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기업들은 CX를 극대화하려 갖은 애를 썼다.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는 "으르릉~"하는 배기음을 키워 야성미란 고객 경험을 선사했다. 샤넬 향수는 꿈같은 배경화면에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델 광고로 구매자에게 자신이 귀족이나 신이 된 듯 고급한 고객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감동조차 귀찮아졌다. 고객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고 요구하면 안 된다. "즐거우셨나요? 별점을 매겨주세요"는 어불성설이다. 손님은 자기가 그 상품(서비스)을 사는지도 모른 채, 입장해서 나갈 때까지 스르륵 최면술 걸린 듯 구매를 마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감 경험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몇 번 터치하면 주문이 끝나고, 주소와 결제수단은 이미 입력돼 있다. 무엇을 살지 고민하기도 전에 이전 구매 기록과 취향을 분석한 추천 상품이 화면에 뜬다. 사용자가 멈추거나 생각하거나 귀찮아할 틈을 없애는 것이다. 나를 조르지도 밀지도 않지만 이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하게 된다. 장자에 함포고복(含哺鼓腹), 배부른 백성은 왕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부지불식간에 원하는 바가 성취되면 고객은 굳이 출처를 따지지 않는다.

 

▲ 챗GPT 생성

 

마찬가지로 '시성비(時成比)'란 신조어도 요새 유행 중이다.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 가성비란 말에서 가격을 시간으로 바꾸어 넣은 말이다. 그만큼 시간절약형 서비스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굳이 '시간이 돈'이라는 속담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갈수록 바빠지는 세상에 내 시간을 절약해주는 상품과 서비스라면 돈을 지출할 의향이 있다고 한다. 

 

온라인에 넘쳐나는 각종 심부름 대행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 없이 대신 일을 처리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사업모델이다. 옷은 살 때부터 세탁 등 관리, 폐기처분까지 대행시킬 수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고 패션 취향은 어떤지 등록시켜놓으면 월요일부터 금요일, 주말 7일 동안 스케줄에 맞춘 추천의류가 배달된다. '뭘 입을까' 고민조차 외주화한 것이다. 세탁소까지 오갈 필요도 없다. 입던 옷을 출입문 고리에 걸어놓으면 깨끗이 세탁을 한 후 다시 걸어놓는다. 

 

의생활이 이런데 식생활은 말해 뭐하랴. 매일 나 대신 쇼핑을 한 배달 바구니가 문 앞에 쌓인다. 부엌에 들어가기 귀찮으면 배달음식으로 요리를 외주화한다. 강아지 산책을 대신 맡기고, 맛집 웨이팅도 돈을 주고 남에게 시킨다. 나는 시성비 높은 생활로 오로지 즐기기만 하면 된다.

무감이론과 시성비는 인공지능(AI) 디지털 사회의 도래와 함께 더욱 중요해졌다. AI 에이전트는 평소 내가 디지털 세상에 남기는 선호와 취향을 추적해 내가 '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의사결정을 대신한다. 평소 장보기 리스트를 참고해 냉장고에 계란이 떨어지면 쇼핑몰에 주문하고, 다음 달 떠날 여행의 숙소를 대신 예매해주기도 한다. 

 

AI 에이전트들은 서로 연결된 통합 운영체제로 가동되면서 아예 나의 선택과 결정을 대행한다. 그래서 대리인(agent)이라고 불린다. 무심하게, 내가 어떤 일을 하려 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게 이 자동기계들은 우리를 좌지우지한다. 처음에는 내가 AI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AI에게 이용당한다. 인지적 외주화(cognitive offloading) →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 → 판단권 위임의 악순환 과정이다. 내가 AI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조차 갖지 못한 채 무심무감하게 젖어든다. 인간의 주체성이 사라지고 AI 신(神)을 모시게 된 자동판단 사회에서 절약된 시간의 높은 시성비로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21세기 사회관계는 쌍방에서 일방으로 편향되고 있다. 디지털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람들은 일방관계로 달려가고 있다. AI 챗봇과 반려동물, 아이돌 팬덤, SNS 인플루언서 등 나만 일방적으로 추종하고 상대는 전혀 내게 고통을 주지 않는 원웨이 소통에만 매달린다. 

 

인간은 사이 간(間) 자를 이름에 지닌 상호작용의 동물이다. 두 명 이상의 인간이 모여 웃고 울고, 싸우고 협력하며 사회를 만들었다.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의 문명이 형성됐다. 희생과 봉사의 거룩한 종교 도덕도 인간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1명의 무인도 주민밖에 없는 로빈슨 크루소의 섬에서는 문명도 도덕도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역사적 유산은 완벽하게 상호 교류와 대립에서 빚어진 빛과 그림자다. 교류의 미담도 좋지만, 성장은 대립의 상처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관계에서 상처받고 실망해보아야 나의 관계내성이 커진다. 더 큰 관계를 맺을 마음의 여유분도 늘어난다. 자아는 이런 성장 경로를 지닌다. 내 책임으로 실수도 하고 반성도 하면서 주체성은 날카로운 칼처럼 벼려지며 연마된다.

AI 에이전트 사회가 도래하면서 주체성은 더욱 중요해졌다. 누구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1인 창작'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법률, 의료, 회계 등 전문적 지식상품이나 문학, 음악, 미술 같은 문화예술 콘텐츠도 평범한 개인이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창의적인 1인 작가로 글도 쓰고 동영상을 생성하는 인플루언서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1인 비즈니스 창업을 하거나 컨설팅을 해주는 이도 많아졌다. AI 에이전트의 시성비 높은 시간절약형 서비스를 받아가면서 소비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가는 무감 마케팅을 개인 작가와 사업자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가 바로 주체성이다. 나의 철학과 세계관, 취미와 개성, 약점과 장점을 버무린 나만의 매력. 이런 것들이 내 콘텐츠와 비즈니스의 색깔을 정한다. 무감이론과 시성비가 판치는 AI 몰개성 세상에서 뚜렷한 컬러의 주체성이 오히려 세일즈 포인트로 작용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내 결정을 AI에 위임하지 말고, 스스로 고민해보자. 일은 외주화하되, 판단만은 외주화하지 말자. AI를 쓸 때 목적은 내가 정하고, 중요한 판단은 내가 검증하며, 결과의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 노성열 논설위원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을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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