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책꽂이] 호방한 상상력, 곡진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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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 2021-07-12 17:08:10
홍성식 두 번째 시집 '출생의 비밀'
대양과 시간을 넘나드는 광활한 상상력
밑바닥 삶을 위무하는 애틋한 연민

"고등어는 헐값으로도 팔리지 않았다/ 선창가 바람에선 사할린 동백 냄새가 났다// 오징어는 바다에서 자취를 감췄다/ 휘황하게 밝힌 집어등 뒤에 떠난 아내가 서있다// 아들은 또 며느리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을까/ 원수놈의 술집은 긴 불황에도 여전히 흥청댔다"('죽도시장 1')

 

홍성식(50)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출생의 비밀'(도서출판b)을 펴냈다. 1부에는 핍진한 삶의 밑바닥을 잡초처럼 살아가는 군상의 깊은 정한이 꿈틀대는 시편들을 모았다. '죽도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40년을 살아온 엄마를 말하는 첫 시편에서는 겨울 선창가 술을 부르는 철지난 유행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죽도시장2'를 채우는 '기나긴 문자메시지'는 가난한 아버지에게 염치없게도 돈을 청하는, 이혼 위기에 처한 딸의 아픈 사연이다. 

▲16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펴낸 홍성식 시인. 그는 "물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를 읽고 썼다"고 말한다. [도서출판b 제공]


"범선으로 요하네스버그를 떠나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아버지는 목덜미에 나비를 문신한 인도계 아프리카인. 파타고니아에서 태어나 해변으로 밀려온 혹등고래를 치료해준 엄마는 마드리드 뱃사람과 아르헨티나 원주민의 피가 섞인 붉은 얼굴의 메스티소였다.// 바나나를 따서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군도를 오가던 아버지는 초록빛 빙산을 타고 보라보라섬 사촌언니를 찾아온 엄마를 에메랄드빛 산호초가 꺼이꺼이 우는 타히티 북부 갈대숲에서 만났다. 1871년 여름이었다.// 엄마는 망고스틴 여섯 개를 건네는 아버지의 흙 묻은 손바닥을 얼굴로 가져가 달콤하게 핥았다. 둘이 몸을 섞은 얕은 바다에선 일만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맹그로브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웅얼거렸다. 원주민들은 뜨지 않는 달을 기다렸다.// 여섯 달 후. 아버지는 이슬람 양식으로 조각된 여신상을 실은 목선을 타고 바그다드로 떠났다. 움직이는 섬에 오른 엄마 역시 북서쪽으로 흘러갔다. 외눈박이 숙부가 야자유 일곱 병을 들고 나와 배웅했다. 동아시아 낯선 항구에 도착한 엄마는 백 년 후 사내아이를 낳았다. 나는 1971년 부산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다."('출생의 비밀')

 

2부에 포진한 표제작은 이즈음 시인들에게서 쉬 찾기 힘든 광활한 상상력을 내보인다. 대양과 대륙을 넘나들고 시간을 희롱한다. 그렇게 인류는 섞이고 흘러서 여기저기 퍼져나간 것이니, 따지고 보면 모두 한 알의 같은 씨앗에서 싹을 틔운 비밀스럽지 않은 존재들인 셈이다. 

 

"소진한 기력으론 신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길 위의 방')


주체하기 힘든 뜨거움을 시로 발산하는 시인의 정념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시들이 3부에 모여 있다. 이산하 시인은 "이 시집을 열면 벼랑 끝에 홀로 남은 장수의 긴 칼날 위로 흐르는 피가 보인다"면서 "요즘의 소심한 사무원 같은 시에 익숙한 독자들은 홍 시인의 장대한 호흡에 숨이 가쁠 것"이라고 추천사를 썼다. 이산하의 말처럼 홍 시인이 한때 세계를 주유하며 만났던 인연을 시로 풀어낸 4부에 이르면 가쁜 숨은 더 가빠질 터이다. 

 2005년 문예지 '시경'으로 등단했고, 2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 살고 있는 홍성식은 시집 '아버지꽃', 영화 에세이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여행기 '처음, 흔들렸다' 등을 펴냈다. 그는 "김지하와 아르튀르 랭보의 노래에 매료되던 소년이 지천명에 이르렀다"면서 "시를 읽고 쓰는 게 아이처럼 서툴기만 하다"고 '시인의 말'을 썼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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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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