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복귀 계기로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관심 높아져
771년 혜공왕 때 완성, 태후가 주조에서 상당한 역할
혜공왕, 반란으로 피살…누가 왕을 죽였는지 등 논란
'여성으로 태어날 운명→남성으로 탄생' 설화 눈길
3월에 발매된 그룹 방탄소년단(BTS) 복귀 앨범 '아리랑'에는 1분 38초 동안 국보 성덕대왕신종 종소리만 들리는 부분이 있다. BTS 측과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협업으로 탄생한 성덕대왕신종 '뮷즈'(뮤지엄+굿즈)도 앨범 발매에 맞춰 출시됐다. '뮷즈'는 박물관(뮤지엄) 측이 문화유산을 모티브로 만든 상품(굿즈)을 말한다.
BTS 복귀를 계기로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다. 신라 제35대 국왕 경덕왕이 아버지인 제33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이 종 주조를 계획했다. 종은 경덕왕의 외아들인 제36대 혜공왕 때인 771년에 완성됐다. 혜공왕의 어머니인 태후(만월부인)가 주조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얘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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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박물관문화재단과 하이브가 협업한 성덕대왕신종 문양을 활용한 '뮷즈' 판매가 시작된 3월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해외 아미(BTS 팬)들이 '뮷즈' 구입을 위해 길게 줄서 있다. [뉴시스] |
성덕대왕신종은 한국의 역대 종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끓는 쇳물에 아기를 넣어 종을 주조했다는 에밀레종 전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더해, 이 종의 탄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혜공왕과 태후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이 무렵 신라 정치의 비밀과 깊이 관련돼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혜공왕은 758년에 태어나 765년 즉위했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여덟 살 때였다. 초기에는 태후가 어린 왕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을 했다. 언제까지 섭정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780년 스물세 살의 혜공왕은 반란에 휘말려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누가 혜공왕을 죽였는지가 비밀로 남아 있다. 780년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이찬 김지정이다. 이를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혜공왕이 목숨을 잃자, 김양상은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한다. 5년 후 김경신이 왕위를 이어받는다(제38대 원성왕).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 관직이었고, 이찬은 17관등 중 두 번째로 높았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인 진골만이 상대등이나 이찬이 될 수 있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지배층 내부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유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과 왕비가 반란군에게 살해됐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는 이와 정반대다. 김양상과 김경신이 왕을 살해했다고 적혀 있다. 두 사료가 충돌함에 따라 학계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김지정이 실은 친혜공왕파였고, 김양상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반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란으로 왕이 목숨을 잃은 사례는 세계사에 많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세력이 왕을 죽였는지 불분명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혜공왕 피살 사건이 여러 연구자의 관심을 모은 이유 중 하나다.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그 직계 후손이 왕위를 독점한 시대가 혜공왕의 죽음으로 126년 만에 막을 내렸다는 점도 이 사건에 대한 주목도를 높였다.
혜공왕의 생애에는 비밀스러운 부분이 많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탄생 설화부터 범상치 않다.
이에 따르면, 경덕왕이 표훈대사에게 '하늘의 상제(上帝)에게 청해 아들을 두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상제에게 다녀온 표훈대사는 '딸은 가능하나 아들은 합당하지 못하다더라'라고 했다. 왕은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했다. 상제는 표훈대사에게 '아들로 바꾸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왕은 '나라가 위태로울지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잇는다면 족하다'고 말했다. 그 후 혜공왕이 태어났다.
표훈대사는 의상대사의 제자다. 삼국유사에는 이 설화에 이어 혜공왕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언제나 여성이 하는 장난을 하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고 서술돼 있다. 이를 혜공왕이 여성 젠더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혜공왕 재위기에는 반란이 잦았다. 768년 왕궁이 반란군에게 33일간 에워싸였다. 수도만이 아니라 전국을 혼란에 빠뜨린 대규모 반란이었다. 성덕대왕신종 완성 1년 전인 770년에도 반란이 일어났다. 775년에는 반란과 반역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천재지변과 괴이한 일이 거듭됐다는 기록도 있다. 잦은 반란과 천재지변은 정치 불안정을 말해주는 기록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정치 불안정의 책임 소재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에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졌고, 돌아다니며 즐기는데 절도가 없어 기강이 어지러워졌다고 돼 있다. 혜공왕 때문에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는 취지의 서술이다. 삼국유사에는 태후가 조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을 수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주요 문제는 태후 쪽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히는 서술이다.
누가 혜공왕을 죽였는가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 정치 혼란의 주요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혜공왕 모자 이야기에서 에밀레종 전설이 비롯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혜공왕이 태후에게 눌려 왕으로서 힘을 쓰지 못하고 일탈을 일삼다가 반란으로 목숨을 잃자, 신라인들이 그런 상황을 빗대어 이 전설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 과정에서 혜공왕을 종 주조 과정에서 희생된 아기, 태후를 아기를 시주한 어머니로 설정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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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9월 24일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2025 성덕대왕신종 타음 조사 공개회'에서 타종이 진행되고 있다. [뉴시스] |
성덕대왕신종이 완성된 시기 전후의 혜공왕 관련 기록을 접할 때 유의할 점이 있다. 먼저 혜공왕 탄생 설화 등의 밑바탕에 남존여비 사상이 전제돼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혜공왕이 본래 여성으로 태어날 운명이었기 때문에, 여성 젠더 정체성을 지녔을 것이기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졌다고 곡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한 것은 여성인 태후가 섭정을 했기 때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필요한 것은 여성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아니라 당시 신라 지배 체제에 쌓인 문제점을 폭넓게 살필 눈이다.
다른 하나는 성덕대왕신종을 완성하기까지 피지배층이 져야 했을 부담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종을 만드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경덕왕이 구리 12만 근을 희사해 이 종을 주조하려 했다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대규모 물력을 투입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 부담은 결국 피지배층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덕대왕신종 주조는 그 부담을 감당한 피지배층의 노고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지만, 정확한 부담 내역은 알기 어렵다. 그것이 이 걸작에 얽힌 또 다른 비밀일지도 모른다.
△주요 참조=이기봉 논문(「신라 혜공왕대의 薦擧와 災異」, 『신라문화』 51, 2018), 이현주 논문(「신라 중대 만월태후의 자기인식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여성과역사』 27, 2017), 성낙주 논문(「'에밀레종 傳說'의 政治學的 讀解」, 『한국문학연구』 31, 2006), 조범환 논문(「신라 中代末 惠恭王의 婚姻을 통하여 본 政局의 변화」, 『신라문화』 43, 2014), 전덕재 글(「누가 혜공왕을 시해했을까」, 『한겨레21』, 2016)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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