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 679년 신라 문무왕 때 건립돼…고려·조선에도 존재
궁궐 중심 전각인 정전의 동쪽에 배치…동쪽은 봄 상징
경복궁 내 동궁 일대 모두 철거되는 등 일제 강점기 수난
넷플릭스 드라마 '동궁'이 인기다. 17일 공개된 후 3일 만에 '비영어권 쇼 톱 10' 순위에서 드라마 '김부장'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미스터리, 판타지, 사극 등의 요소가 섞인 이 드라마의 배경은 조선 궁궐이다. 주인공들이 세자들의 연이은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해 현실 세계와 귀신의 세계를 오가며 활약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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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드라마 '동궁' 예고편의 한 장면. |
동궁(東宮)은 세자, 또는 그 세자가 거처한 곳인 세자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귀신이 넘쳐나는 드라마 속 동궁과는 달랐던 역사 속 동궁 즉 세자궁에 대해 살펴보자.
간단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동궁은 조선에만 있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조선에 앞서 중국 고대 왕조에 있었다. 한국 고대사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인 679년 수도 경주에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고쳐 짓고 동궁을 건립했다. 다음 왕위에 오를 태자의 공간으로서 동궁을 마련한 것이다.
사적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동궁이 바로 이 신라 동궁이 있던 별궁 터를 가리킨다. 다만 신라 동궁이 정확히 어디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학계에서 견해가 엇갈렸다.
예전에는 월지 서편을 동궁 터로 여기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발굴 조사가 이어지면서 태자의 공간은 월지 동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늘었다. 월지 동편에서 규모가 큰 건물 터 흔적이 발견되고, 삼국 통일 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세식 화장실 유적이 처음으로 확인돼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국가유산청은 "월지 동편 건물 터를 동궁으로 보고, 당초 동궁으로 추정했던 서편 건물 터를 왕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태자궁은 삼국 중 신라에만 있었을까?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태자라는 칭호가 사용된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태자궁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동궁은 고려에도 있었다. 고려 전기에는 태자라는 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동궁 즉 태자궁에 많은 관속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의 간섭을 받은 고려 후기에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 제25대 충렬왕(재위 1274~1308년) 때 태자는 세자로, 태자궁은 세자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자는 제후국 지위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 용어다. 조선에서도 세자라는 칭호가 그대로 사용된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다시 상황이 달라져 세자 대신 황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태자궁 또는 세자궁은 왜 동궁으로 불렸을까? 궁궐의 중심 전각인 정전(正殿)의 동쪽에 배치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제4대 세종(재위 1418~1450년) 때 세자 관련 의례를 정비하면서 경복궁 근정전 동쪽에 세자궁을 조성했다. 그 이전에는 경복궁 내에 별도의 세자궁이 없었다.
동쪽은 음양오행에서 새싹, 성장을 상징하는 목(木)에 해당한다. 또한 주역 64괘 중 우레가 쳐서 사물을 진동시켜 만물이 소생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진(震)괘가 동쪽을 가리킨다. 동쪽이 봄을 상징하기 때문에 동궁은 춘궁(春宮)으로도 불렸다.
이름만 놓고 보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지만, 조선 시대 동궁은 느슨함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었다. 왕위 계승 예정자에 대한 엄격한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때로는 몰아치는 북풍한설 같은 정치적 격랑에 휘말려 피바람이 불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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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동궁 영역.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
조선의 세자는 편안한 자리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의 첫 번째 세자였던 의안대군 이방석(태조 이성계의 여덟째 아들)은 1398년 이복형인 정안군 이방원(훗날의 태종)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었다.
제3대 태종(재위 1400~1418년)의 큰아들 양녕대군은 부적절한 행실이 문제가 돼 폐위됐다. 왕위 계승 예정자 자리를 박탈당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것이 권력의 생리인 것에 비춰보면, 양녕대군은 운이 좋았다. 동생 세종의 배려 속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었고, 세종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현재 권력'인 국왕과 사이가 멀어지면 '미래 권력'인 세자는 언제든 위험한 처지에 놓일 수 있었다. 제15대 국왕 광해군(재위 1608~1623년)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세자 시절 전국을 누비며 항전에 힘썼지만, 공이 쌓일수록 아버지 선조의 질시와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제16대 인조(재위 1623~1649년)의 아들 소현세자는 아버지의 냉대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독살설이 제기될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아버지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년)의 아들 사도세자의 비극이다. 이 사건이 국왕의 공간과 동궁 간 거리를 조정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고 평가하는 연구자도 있다.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창경궁은 동궐로 불렸다. 사도세자의 동궁 권역은 동궐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동궐 중심부에 있는 국왕의 거처와 적잖은 물리적 거리가 존재했다.
역사학자 이민아 논문(영조대 이후 궁궐 내 세자 공간 운용과 변화의 정치적 의미)에 따르면, 영조는 처소를 동궁 근처로 옮길 만큼 사도세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접촉면을 유지했다. 하지만 아들과 사이가 틀어지자, 동궐을 떠나 경복궁 서쪽 경희궁(서궐)으로 옮겨갔다. 국왕의 거처와 세자의 거처를 완전히 분리하고, 동궐에 있는 사도세자와 만나는 것을 회피했다.
제22대 정조(재위 1776~1800년)가 궁궐 공간에 변화를 줬다. 정조는 동궐의 주변부에 있던 동궁 권역을 국왕 집무실인 편전 근처로 옮겼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영조와의 지나친 물리적 거리에서 비롯됐다고 파악하고 취한 조치로 풀이된다. 동궁과 국왕의 공간을 긴밀하게 연결한 이러한 기조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지은 제26대 고종(재위 1863~1907년) 때까지 이어진다.
동궁은 일제 강점기에 수난을 겪는다. 경복궁 내 동궁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 모두 철거됐다. 동궁 전각 중 하나인 자선당은 철거된 후 그 부재(部材)가 일본으로 반출돼 사설 미술관 건물 재료로 활용됐다. 그러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건물은 대부분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 정도의 유구만 남게 됐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 자선당 유구는 경복궁에 반환됐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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