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홀 미팅이 8월 22~24일 열렸다. 잭슨홀 미팅은 미국 와이오밍주의 휴양지 잭슨홀에서 매년 8월 열리는 글로벌 경제 회의다.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경제학자,금융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해 경제·통화 정책을 논의한다. 글로벌 통화정책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바로 이 회의에서 2005년 라구람 라잔(Raghuram G. Rajan) 인도 중앙은행 총재가 글로벌 금융위기 가능성을 언급했고, 2010년에는 벤 버냉키(Ben Bernanke) 미 연준 의장이 2차 양적완화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번 회의에서도 주목할 만한 화두가 테이블에 던져졌다. "미 달러의 지배적 지위가 글로벌 경제 안정성을 해치고 있다." 마크 카니 영국 중앙은행(영란은행) 총재가 포문을 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달러를 대체할 화폐를 마련해야 한다"면서. 한마디로 기축통화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카니 총재는 "미국은 국제 무역에서 10%, 글로벌 경제 생산량에서 15%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 무역 거래 중 절반과 글로벌 증권 발행 중 3분의 2가 달러를 통해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달러의 과수요가 글로벌 금융 안정을 해친다는 게 카니 총재의 지적이다.
의심받는 달러 리더십
카니의 발언은 달러 패권, 달러 리더십에 대한 의심이자 도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자 경고이기도 했다. 트럼프의 어메리카 퍼스트, 미국우선주의에 기초를 둔 무역정책이 기축통화인 달러의 지위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중 무역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글로벌 경제 불안정성이 커지자 달러 위주인 국제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잭슨홀 미팅에서 쏟아졌다고 8월 26일 보도했다.
FT는 "올해 잭슨홀 미팅에서 글로벌 시스템이 전환점에 다다랐다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공감대가 감지됐다"고 전했다. 이날 잭슨홀에 모인 정책입안자들은 미국이 더 이상 예측 가능한 경제·무역 정책 행위자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금융 리더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기축통화로 군림해온 달러 기반 체제의 효용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기축통화를 보유한 미국은 국제 금융 안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도 오로지 자국이기주의만 외치고 있다는 비판이다.
정리하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계속된 미국의 초저금리 정책과 양적완화(QE)에 따른 유동성 과잉,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무역전쟁이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웠다는 불만이 잭슨홀 미팅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기축통화의 힘과 책임
기축통화란 전 세계 수많은 통화 중에서 기준이 되는 통화다. 국제 금융거래시 거래 당사자가 예측 가능하게 서로 주고 받도록 하는 것이 기축통화의 핵심 역할이다.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를 무한정 달러를 찍어내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었듯이 기축통화는 막강한 힘이요, 권력이다. 1997년 한국의 국가부도사태도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야 하는 한국은행에 외환보유액, 즉 달러가 거의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그런 힘과 권력엔 책임이 따른다. 미국이 기축통화를 보유한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국제 금융 질서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은 2008년 불어닥친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천문학적으로 달러를 풀었는데 이렇게 풀린 달러가 국경을 넘어 신흥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돈을 갑자기 회수해버리면 신흥국은 금융위기를 맞을 수 있다.
모리스 옵스펠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다른 나라가 미국 행위를 예측할 수 있을 때는 글로벌 통화 시스템에 대한 통제를 미국에 양도할 의지가 있었으나 이러한 접근이 점점 세밀히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축통화, 가능한가
기축통화 달러에 대한 의구심이 이 번 회의에서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국제 통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나라가 바로 기축통화국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러 파워'를 고려할 때 당장 달러를 대체할 기축통화가 등장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논의의 물꼬는 트였다. 비트코인과 같은 디지털 가상화폐가 됐든, 달러를 대체할 기축통화 논의는 이어질 것이다.
"As a consequence, it is an open question whether such a new Synthetic Hegemonic Currency (SHC) would be best provided by the public sector, perhaps through a network of central bank digital currencies."
마크 카니 총재도 'Synthetic Hegemonic Currency, 즉 새로운 패권통화, 기축통화로 'network of central bank digital currencies'를 말했다.
"중국이 할 얘기를 영국이 했다"
마크 카니 총재는 전형적인 금융 엘리트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를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골드만삭스에서 13년 근무했고 캐나다 재무부를 거쳐 2008년 43세에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에 올랐고 2013년 임기를 마치자 마자 영란은행 총재로 스카웃됐다. 영란은행 총재를 사상 처음 외국인이 맡은 것이다.
그러나 이 번 회의에서 그의 도발에 미국 당국자들은 위협으로 느끼기는 커녕 콧방귀를 꼈을 지 모른다. 영국의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 문제를 마무리하기에도 정신이 없는 지금, EU마저도 탈퇴해 고립을 자초하는 나라의 중앙은행 총재가 새로운 금융질서를 주창했기 때문이다. "주제 파악을 못한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 역사에 정통한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는 페이스북에 "지금도 유로은행에 가입하지 않고 EU에서도 탈퇴하겠다는 사람들이 전대륙 중앙은행 클럽에는 가입하겠다고? 헐"이라고 촌평했다.
마크 카니의 발언은 사실 중국이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 미국의 금융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세컨드맨', '넘버2' 중국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중국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고작 관영매체(글로벌타임스)를 통해 "미국이 세계 금융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면서 "금본위제 복귀를 준비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주장을 할 뿐이다.
차 교수는 "중국은 실크로드 시대부터 비단, 도자기, 향신료 등 제조업 중심으로 발전해 지금 드론까지 만들지만 금융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크 카니 총재가 주제 파악 못하고 도발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논의의 물꼬를 튼 건 카니 총재다. 세계 경제가 미국 달러에 대한 위험한 의존상황을 끝내야 한다는, 역사적 어젠다를 던진 것이다.
KPI뉴스 / 류순열 기자 ryoos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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