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기자의 눈] '낮은 포복' 부모의 밥 바구니와 제주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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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낮은 포복' 부모의 밥 바구니와 제주 4·3사건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Google구글에서 선호하는 출처로 추가
기사승인 : 2023-04-07 10:06:13
영화 '지슬' 배경 동광큰넓궤 답사 기억과 아픈 역사
4·3 희생자와 유족의 삶을 바꾼 국가의 폭력 인정
밝혀진 진실과 피해자 목소리 귀 기울이는 게 기본
햇살이 따사롭던 1996년 3월 마지막 주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공산 폭동'으로 불리던 4·3 사건의 유적지 답사 차 제주를 찾은 대학생 수십 명과 지도교수 등이 땅 밑으로 기어들었다. 제주4·3연구소 측 안내가 없었으면 찾기도 어려웠을, 이름도 낯선 '궤' 속으로.

▲영화 '지슬'의 한 장면. 동광큰넓궤에 피신한 주민들이 지슬(감자)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다. [자파리 필름 제공]

궤는 땅 깊숙이 파여 들어간 굴을 가리키는 제주도 사투리다. 바위 등으로 가려져 있어 밖에선 그냥 작은 구멍처럼 보인다. 현지인이 아니면 그게 굴인지 알기도 어렵다.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오리걸음으로 나아가야했는데, 그것도 잠시뿐. 한 사람씩 줄지어 엎드려야했다. 얼마 후 절벽(높이 3~4미터)이 나왔다. 거길 내려가니 겨우 설 수 있었지만 금세 다시 낮은 포복 구간이다. 그렇게 수십 미터를 더 들어가니 몇십 명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울퉁불퉁한 바닥, 현무암 특유의 질감, 칠흑 같은 어둠. 기존 답사와 많이 다른 이 특이한 경험은 기자를 비롯한 답사단에게 오랫동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동광큰넓궤', 훗날 영화 '지슬'(2013년 작)의 배경이 된 바로 그곳이다.

4·3사건이 일어난 1948년.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이 학살을 피해 그해 11월부터 40일 넘게 이곳에 숨어 살았다. 연기가 새어 나가 들킬까 봐 궤 안에서 밥도 지을 수 없었다. 근처의 다른 굴 등에서 며칠에 한 번씩 몰래 밥을 지어야했다. 이 밥을 '차롱'(납작한 대바구니를 가리키는 제주도 사투리)에 담아 궤로 가져왔다. 

차롱을 안은 부모가 낮은 포복 구간을 지나 굶주린 자식에게 가는 풍경, 그것이 궤의 현실이었다. 자식들을 나눠 숨기는 부모도 있었다. 발각되면 하나라도 살길 바라는 심정으로.

'볼일'도 궤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은밀히 밖에 나갈 때는 발자국 흔적을 지우려고 돌만 디디려 했다. 그토록 조심했지만 끝내 발각됐고 많은 사람이 학살됐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희생자가 상당수였다. 그 후 수십 년간 피해자인데도 입을 뻥끗할 수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공산 폭동'이라는 규정은 사라졌다. '지슬'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면서 동광큰넓궤를 찾는 사람이 늘고 안내판도 생겼다.

홍춘호 할머니 사례는 상징적이다. 동광큰넓궤에 피신했던 열한 살 소녀 홍춘호. 65년이 지난 2013년 그곳을 다시 찾았고 현재 여든여섯 나이로 4·3문화해설사 일을 하고 있다. 

동광큰넓궤 쪽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던 홍 할머니가 용기를 낸 계기는 국가의 잘못 인정이었다. 4·3특별법 제정(2000년), 진상보고서 확정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2003년), 대통령의 위령제 참석(2006년)이 이어진 덕분이었다. 국가 폭력 인정은 4·3 피해자 전체의 삶을 바꿨다.

진보 표방 정부만이 아니라 보수 성향 정부일 때에도 진척은 있었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2014년 박근혜 정부 때 이뤄졌다. 대통령의 위령제 불참이 아쉬움을 남겼지만 보수 성향 정부의 국가기념일 지정은 분명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최근 이러한 흐름을 뒤집으려는 위험한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근거 없는 '김일성 지시설'을 여권 인사가 제기하고 4·3 희생자 추념식 당일에는 극우 단체가 소동을 일으켰다.

위험한 시도가 먹히면 피해자가 숨죽였던 시대로 퇴행할 우려가 있다. 밝혀진 진실과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기본이다.

여건이 된다면 4·3 유적지를 답사해볼 것을 권한다. 자식에게 줄 밥 바구니를 안고 낮은 포복으로 기어들어야 했던 부모의 심경을 현장에서 느껴본다면 역사 왜곡에 넘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김덕련 기자

KPI뉴스 / 탐사보도부 김덕련 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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