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 시작으로 반민특위 습격, 김구 암살 이어져
'친일 청산 저지, 극우 반공 체제 강화'라는 하나의 방향 지향
세 사건을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로 평가하는 연구자 다수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제헌 국회의원 10여 명이 연이어 검거·기소됐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국회 프락치 사건). 그해 6월 6일 친일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던 경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했다. 20일 후 백범 김구가 암살됐다. 세 사건은 서로 무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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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홈페이지. |
반민특위 관계자 유족 등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반민특위기념사업회,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전국시국회의는 9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반민특위 습격 및 강제 해체 사건 진실 규명을 신청했다. 이 단체들은 이 사건을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사건과 연동된 역사적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자. 1949년 5월 이문원 등 현직 국회의원 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됐다. 이를 시작으로 그해 8월까지 총 15명의 국회의원이 검거됐다. 그중 13명이 기소됐다. 제헌 국회 의원 정수(200명)의 6.5%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검거된 사람들은 제헌 국회에서 소장파로 불리던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미국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했다. 김구 쪽과 통하는 면이 많고 이승만 정부와는 대립각을 세우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또한 반민특위 결성에 앞장서며 친일 청산에 적극 나섰다. 반민특위 일원으로 활동한 소장파 의원도 있었다. 친일 세력이 중핵을 이룬 경찰은 이승만 정권의 주요 기반 중 하나였다. 이래저래 소장파 의원들은 이승만 정부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경찰 등을 비호하며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했다.
5월에 국회의원 3명이 검거된 후,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다른 소장파 의원 등을 적색분자로 몰아가는 이른바 민중 대회가 열렸다. 그 배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사주를 받은 시위대는 6월 2일 국회 앞에서 반민특위를 비방하며,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3일에는 반민특위에 몰려가 난동을 부렸다.
소장파 의원 검거를 매개로 반민특위에 대한 공격을 확대한 것이다. 반민특위 산하 특별경찰대는 친일 경찰로 악명 높던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 등을 시위대 배후로 파악하고 연행했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6일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를 계기로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지고 친일파 처벌은 흐지부지된다.
그달 26일에는 이 대통령의 잠재적인 최대 라이벌로 꼽히던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앞서 김구는 1948년 분단 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5·10총선에 불참했다. 1949년 들어, 김구가 현실 정치 무대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김구가 차기 대선에 출마한다면 이 대통령은 물론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안두희는 김구 암살 후 특별 대우를 받았다. 겨우 1년 만에 풀려나 군에 복귀했다. 군을 떠난 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차려 풍족하게 살았다. 군부를 위시한 정권 차원의 비호가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구 암살 사건의 전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 피살 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피고인들은 모두 자신이 남로당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취조 과정에서 자백한 내용은 고문으로 인해 허위 진술한 것이라고 법정에서 호소했다.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 측에서 검찰 측 핵심 증인으로 거론된 정재한이라는 여성에 대한 면담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1950년 3월 1심에서 피고인 13명에게 징역 3년부터 징역 10년까지 중형이 선고됐다. 피고인들은 모두 항소했다. 그러나 1심 판결 석 달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형무소에서 풀려난 피고인들이 대부분 납북되거나 월북하면서 항소심은 진행되지 않았다.
고문을 당했다는 국회 프락치 사건 피고인들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진실화해위는 피고인 중 2명(고 김옥주·김병회 의원)의 자녀들이 진실 규명을 신청한 이 사건에 대해 '중대한 인권 침해'라고 지난해 4월 판단했다. 당시 체포 현장에서 의원들에게 영장을 제시하거나 변호인 선임권 등을 고지하지 않았으며, 의원들이 헌병대에서 전기 고문 등 가혹 행위로 인해 자백한 사실 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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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6월 5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과 반민특위 후손 모임이 국회에서 '반민특위 습격 사건, 경찰청 사과 촉구'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
이번에 반민특위 관련 진실 규명을 신청한 이들은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 및 강제 해체 사건, 김구 암살 사건을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로 본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들이 아니라, 친일 청산을 막고 이승만 정권과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한다는 하나의 방향을 지향한 일련의 흐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국회 프락치 사건은 반민특위 습격과 김구 암살의 전주곡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6월 공세'로 규정하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다수의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도 오래전부터 세 사건을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로 평가해왔다. 그중 한 사람인 한홍구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지난 6월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 김구 암살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나 권력 강화를 위한 친위 쿠데타라는 점에서 뿌리가 하나"(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반민특위 강제 해체, 내란의 뿌리 이승만 친위 쿠데타' 토론회)라고 지적했다.
세 사건을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해온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국가 기구 차원에서 반민특위 습격 및 강제 해체 사건과 '6월 공세'의 전모를 밝힐 수 있을까. 진실화해위가 향후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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