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강준만의 직설] 세상은 원래 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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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직설] 세상은 원래 회색이다

UPI뉴스
기사승인 : 2021-11-17 11:09:42
흑백 편가르기 세상 속 '지분 나누기' 낄 수 없는 색상이지만
완벽하게 흑, 백인 사람은 극소수, 나머지는 중간지대에 있어
회색지대서 당당하게 정치와 언론에 '그러지 말라'고 외쳐야

"흑과 백 사이에도 다양한 명도의 회색이 있다. 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퍼지식 사고이다. 기업의 전략이 양에서 질로 바뀌었다는 것을 흑백논리로 본다면 양을 버리고 질만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퍼지 사고로 보면 양과 질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퍼지 사고는 모든 요인을 총체적으로 보고, 복합적으로 판단하며 동시에 창조적인 발상을 할 때 가능하다."

삼성 회장 이건희가 1997년에 출간한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퍼지 사고'의 수용을 역설하면서 한 말이다. 인용할 게 없어서 재벌 회장의 말을 인용하느냐고 할 사람들도 없진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재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나는 멋진 말이라 생각해 가끔 인용하곤 한다.

오늘날엔 기업 경영에서부터 자기 계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회색 찬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완강하게 회색을 거부하거나 폄하하는 곳이 있으니, 그게 바로 정치 분야다. 회색 옷을 즐겨 입고 회색 계열의 색상을 가진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 좀 많은가. 회색 자체에 대해선 편견이 없는 것 같은데, 정치적 성향과 관련해선 회색을 영 좋지 않게 본다. 그렇다고 해서 흑백 이분법을 드러내놓고 찬양하는 것 같진 않은데, 왜 회색에 대해선 그러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회색 예찬론자인 토론 진행자 정관용은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불통의 시대, 소통의 길을 찾다>는 책에서 "우리 사회는 남북분단과 전쟁이라는 이념적 대립 속에서 회색인 내지 회색지대라고 하면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다. 회색은 흰색과 검은색이 격렬하게 어우러져 만들어진, '훨씬 더 아름다운 색'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영논리로 편을 가르고 너는 누구 편이냐고 따진 뒤 우리 편이라 하면 무슨 말을 해도 용인하고, 다른 편이면 무슨 말을 해도 비판하는 한 진전은 없다. 완벽하게 흰색과 검은색인 사람은 극소수다. 나머지는 중간지대에 있다. 우리가 회색지대에 모여 당당하게 정치와 언론에 '그러지 말라'고 외치자는 의미였다. '집단이익만 추구하는 권력투쟁에서 벗어나서 공동체 미래에 대안을 내놓고 타협·절충하라'고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진전할 수 있다."

소설가 장강명은 언론 인터뷰에서 "현실에서 한 줄짜리 답은 없더라"면서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 손을 들어주고, 누구를 혼내줘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회색분자라는 비판을 받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세상이 원래 회색"이라고 답했다. "세상이 회색인 거 뻔히 알면서 본인의 이익을 위해 흰색, 검은색으로 편을 가르는 이들을 싫어합니다."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는 좋은 말들이 아닌가. "세상은 원래 회색"이라는 장강명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사실 인구 비중으로 보더라도 중도는 보수나 진보보다 더 많다. 회색이 곧 중도는 아니지만, 현 상황에선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 상황'이란 이런 이야기다. 현재의 보수와 진보가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가짜라고 생각하는 진짜 보수나 진짜 진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존 정치판에서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서게 되는데, 이런 입장을 가리켜 회색이나 중도로 부르기도 한다. 즉, 회색이나 중도는 이념적 기준이라기보다는 현 정치 상황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개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흑이나 백을 택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회색을 택하고 있음에도 회색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존재하고, 그래서 자신이 회색임을 당당하게 천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열정적인 편가르기가 이루어진 세상에서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걸린 일에선 더욱 그렇다. 승자독식 전쟁에서 흑과 백은 각각 50%의 확률로 지분 나누기에 낄 수 있지만, 회색은 누가 이기고 지건 아무런 지분이 없다. 속된 말로 남는 장사가 아닌 셈이다.

중앙대 명예교수 이상돈은 최근 한국일보에 기고한 "이 절망적인 극단의 정치를 어찌할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무엇보다 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하는 극단적인 정치가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위험 요소임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고 개탄한다. 이렇게 개탄하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런 목소리를 결집하는 일은 쉽지 않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의 시장 논리가 잘 말해주듯이, 사람들은 '권력 감정'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분노와 증오 유발자들에게만 몰려 들기 때문이다.

회색의 정치화는 가능한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간 그런 시도가 여러 차례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실패 이유를 제대로 봐야 한다. 모두 다 대통령 권력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지명도와 영향력으로 회색 지대의 정치적 저변 확대와 제도화를 위해 애썼더라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를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의 비극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회색정신에 충실하지 못한 욕심 또는 성급함 탓일 수도 있다. 세상은 원래 회색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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